낫지 않는 병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 기전부터 다시 보는 이유
여러 병원을 다녔는데도 낫지 않는다면, 문제는 치료가 아니라 "무엇을 보고 있느냐"일 수 있습니다.
오래된 병일수록 지금 겉으로 드러난 증상만 쫓으면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난치성 질환을 진료할 때, 증상 목록을 다시 나열하는 대신 그 병이 어떤 순서를 밟아 왔는지부터 되짚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지, 그리고 그게 치료에서 무엇을 바꾸는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왜 "낫지 않는 병"이 생길까요
한 가지 증상이 오래 지속되면, 몸은 그 위에 두 번째, 세 번째 문제를 쌓아 올립니다. 처음엔 순환의 문제였다가 시간이 지나며 조직의 변화로 굳어지고, 거기에 소화·수면·자율신경의 흐트러짐이 겹칩니다. 그래서 오래된 병은 원인 하나가 아니라 겹겹이 쌓인 부담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닙니다. 오래 이어진 부담이 신경·내분비·면역·대사에 걸쳐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은 숫자로 재어 왔고, 만성질환을 가진 분들에게서 그 지표가 실제로 높게 나옵니다. 통증 쪽에서는 더 분명합니다. 같은 자극이 반복되면 신경 자체가 예민해져, 처음 다친 자리가 아물어도 통증이 남고 번집니다.
이런 상태에서 맨 위층의 증상만 치료하면, 잠시 나아졌다가 아래층의 문제가 다시 올라옵니다. "치료할 때만 잠깐 좋아진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기전부터 다시 봅니다
저는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에서 질병의 기전을 연구했습니다. 그 배경으로, 난치성 질환일수록 병이 걸어온 길 전체를 다시 그려봅니다.
- 어디서 처음 조절이 무너졌는가
- 그 위에 무엇이 순서대로 쌓였는가
- 맨 위층에서 힘든 증상은 그중 어디에 뿌리를 두는가
같은 진단명을 받은 두 사람이라도 걸어온 길이 다르면 치료의 출발점도 다릅니다. 이 지도를 먼저 그려야, 어느 층부터 손대야 할지가 보입니다.
어디까지 도울 수 있는지부터 짚습니다
오래된 병 앞에서 저는 먼저, 지금 상태에서 한방 치료가 손을 댈 수 있는 자리가 어디까지인지를 짚어 드립니다. 도움이 어렵다고 판단하면 그렇게 말씀드리고, 필요한 검사나 다른 진료를 먼저 권합니다.
막연한 기대도, 지레 포기도 아닌 — 근거 있는 방향을 함께 잡는 것. 그것이 오래된 병 앞에서 할 수 있는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방문 전 준비하시면 좋은 것
- 그동안 받은 검사 결과지(가능한 시간 순서대로)
- 현재 복용 중인 약 목록
- 증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고 변해왔는지에 대한 간단한 메모
이 자료가 있으면 병이 걸어온 길을 훨씬 정확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기존에 받고 계신 치료는 중단하지 마시고, 그 위에서 무엇을 더할 수 있을지 함께 상의하는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참고한 자료
- 만성질환을 가진 사람에서 여러 계통에 걸친 누적 부담 지표가 유의하게 높게 나타났다 (인구 조사 자료) — Metabolic Syndrome and Related Disorders, 2022
- 통증 자극이 반복되면 중추신경 자체의 흥분성이 올라가, 원래 손상 부위와 무관하게 통증이 증폭되고 지속된다 — Pain, 2011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