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탓'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면
검사지를 한 뭉치 들고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피검사, 심전도, 위내시경, 뇌 영상까지.
전부 정상입니다.
그리고 그걸 꺼내 놓으시면서 대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 정상이래요. 제가 예민한가 봐요."
미안해하실 일이 아닙니다.
검사지가 두꺼울수록 오래 헤매신 겁니다
그 뭉치는 게으름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동안 얼마나 애쓰셨는지의 기록입니다.
한 군데서 정상이라 하면 다른 데를 갑니다. 거기서도 정상이라 하면 또 다른 데를 갑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말을 아끼게 되십니다. 또 "괜찮은데요"라는 말을 들을까 봐요.
그러면서 자기 몸을 의심하기 시작하십니다. 저는 이 대목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가장 먼저 아는 사람은 본인인데, 그 사람이 자기 감각을 못 믿게 되는 겁니다.
검사에 안 보이는 것과 없는 것은 다릅니다
검사는 장기를 봅니다. 모양이 성한지, 수치가 범위 안에 있는지.
그런데 몸에는 장기 말고 그 장기들을 조율하는 층이 있습니다. 심장을 얼마나 빨리 뛰게 할지, 위를 언제 움직일지, 자세가 바뀔 때 혈압을 얼마나 빨리 되돌릴지. 하루 종일 조용히 돌아가는 일들입니다.
이 층이 흔들리면, 장기는 멀쩡한데 증상은 생깁니다. 그리고 검사는 이 층을 잘 못 봅니다. 볼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니까요.
그러니 "다 정상"과 "아무 문제 없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제가 가진 도구로는 안 보입니다"에 가깝습니다. (검사는 정상입니다라는 말의 정확한 뜻)
그래서 진료실에서는
증상을 다시 들려주십사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어떨 때 심해지는지,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건 위로하려고 듣는 게 아닙니다. 정보라서 듣습니다. 검사가 못 보는 층은 시간표와 패턴으로 드러납니다. 아침에 심한지 밤에 심한지, 긴장할 때인지 쉴 때인지 — 그게 어느 조절이 흔들리는지를 알려 줍니다. (만성 질환에는 시간 축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검사가 정상이라는 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위험한 것들이 걸러졌다는 뜻이니까요. 그 위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다만 아직 안 받아 보신 검사가 있다면 그것부터 권해 드립니다. 순서를 건너뛰지는 않습니다.
"기분 탓"이라는 말을 오래 들으셨다면, 그 말은 접어 두셔도 됩니다.
몸은 거짓말을 잘 못 합니다. 다만 우리가 아직 그 말을 다 못 알아들을 뿐입니다.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