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칼럼 난치질환 클리닉
블로그 2026년 7월 10일

오래된 병에서 시간이 하는 일

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의료 감수 허지영 대표원장

"별일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어요."

오래 아프신 분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 보면 "갑자기"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몇 년에 걸쳐 조금씩 쌓인 것이 어느 날 드러났을 뿐입니다.

저는 시간을 병의 배경으로 보지 않습니다. 시간은 몸의 환경을 이루는 하나의 축입니다.

같은 자극, 다른 결과

먼저 이 사실부터 말씀드립니다. 똑같은 자극이 몸을 강하게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운동이 그렇습니다. 근육에 부담을 주면 근육이 손상됩니다. 그런데 적당히 주고 쉬는 시간을 두면 이전보다 강해집니다. 몸이 대비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부담을 쉬는 시간 없이 계속 주면 어떻게 될까요. 강해지지 않습니다. 무너집니다.

자극의 크기가 아니라, 자극과 자극 사이의 시간이 결과를 가릅니다.

   같은 크기의 자극
        ↓
  ┌─────────────┬─────────────┐
  ↓             ↓             ↓
회복할 시간   회복할 시간이   한 번에
가 있다       없다           너무 크다
  ↓             ↓             ↓
더 강해진다   서서히 무너진다  급하게 망가진다
(적응)        (만성화)        (급성 손상)

가운데가 오늘 이야기의 자리입니다. 서서히 무너지는 시간.

몸은 처음에 감춥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몸에 부담이 들어오면, 몸은 바로 아파하지 않습니다. 먼저 감춥니다.

한쪽 무릎이 아프면 반대쪽 다리에 힘을 싣습니다. 소화가 안 되면 덜 먹습니다. 잠이 부족하면 카페인을 마십니다. 염증이 생기면 코티솔을 꺼내 누릅니다.

이 모든 것이 보상입니다. 몸이 문제를 덮고 일상을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아무 일도 없어 보입니다. 검사도 정상입니다. 실제로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잘 감추고 있으니까요.

그러다 감출 여력이 떨어지는 날, 증상이 나타납니다.

그때 환자분은 "갑자기"라고 느끼십니다. 그러나 그날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날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증상이 나타난 곳은 원인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무릎이 아파 오셨는데, 무릎은 오래 버텨 준 쪽인 경우가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몇 년 전부터 쓰지 않던 반대쪽 발목이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려 오셨는데, 심장은 눌려 있었을 뿐인 경우가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부푼 배였습니다.

보상이 오래되면, 보상하던 쪽이 먼저 비명을 지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명이 들리는 곳을 치료합니다.

거기를 치료하면 잠깐 편해집니다. 그러나 원래 문제가 그대로면 다시 돌아옵니다. "치료받으면 좋아지는데 자꾸 재발한다"는 말씀은 대개 여기서 나옵니다.

시간이 조직을 바꿉니다

시간이 하는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조직의 성질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오래 눌리고, 오래 부어 있고, 오래 움직이지 않은 조직은 물을 머금은 채 굳습니다. 밀도가 높아지고 무거워집니다. 그 안에서는 물질이 오가지 못하고, 신호도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되돌아가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는 점입니다. 며칠 만에 굳지 않았듯, 며칠 만에 풀리지 않습니다.

신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증 신호가 오래 반복되면 그 신호를 전달하는 회로가 증폭 상태로 바뀝니다. 나중에는 작은 자극에도 크게 아픕니다. 원인이 사라져도 회로가 남습니다.

병이 오래되었다는 말은, 병이 몸에 자리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회복에도 순서와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첫 진료에서 시간표를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되돌리려는 것 대략
과하게 흥분한 반응을 눅이는 일 며칠
흡수와 대사를 되살리는 일 몇 주
굳은 조직의 성질을 바꾸는 일 몇 달
증폭된 신경 회로를 되돌리는 일 몇 달, 그 이상

한 사람에게 이 네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증상은 일찍 편해지고, 어떤 증상은 늦게 편해집니다.

일찍 편해진 것을 보고 "다 나았다" 여기며 그만두시면, 아직 진행 중이던 것이 남습니다. 그리고 다시 쌓입니다.

오래 아팠던 몸은 오래 회복합니다. 이것은 약이 약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한 일을 시간으로 되돌리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이유

회복은 직선이 아닙니다. 물결처럼 옵니다.

몸이 조금 회복되면, 그동안 감추고 있던 다른 자리가 드러납니다. 무릎이 편해지니 이제 허리가 아픕니다. 나빠진 것이 아니라, 순서가 온 것입니다.

이때 환자분은 실망하십니다. 저는 이 대목을 미리 말씀드리려 합니다. 회복 중에 새로운 곳이 아플 수 있다는 것을요.

다만 이것과 약 때문에 생긴 이상반응은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붓거나, 혈압이 오르거나, 두근거리거나, 맥이 고르지 않거나, 유난히 기운이 빠진다면 — 그것은 회복의 물결이 아닙니다. 약을 멈추고 알려 주셔야 합니다.

"좋아지는 과정이니 참으라"는 말을 저는 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일찍 오십시오

이 글에서 제가 정말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감추고 있는 동안이 가장 되돌리기 쉬운 때입니다.

검사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시기, 조금 불편하지만 참을 만한 시기. 그때는 환경만 달라졌을 뿐 부품은 아직 멀쩡합니다. 되돌릴 수 있습니다.

증상이 뚜렷해졌을 때는 이미 몸이 감출 여력을 잃은 뒤입니다. 되돌릴 수는 있지만 훨씬 오래 걸립니다.

"이 정도로 병원 가기 뭐해서요"라고 하시는 분들께, 저는 그 '이 정도'일 때 오시는 편이 낫다고 말씀드립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만성화된 통증에서 신경 회로가 증폭 상태로 바뀐다는 것(중추 감작), 오래 눌린 조직의 성질이 변한다는 것, 반복되는 스트레스가 조절 호르몬을 소모시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만 "시간을 하나의 축으로 본다"는 관점은 제 해석입니다. 교과서의 분류가 아닙니다. 저는 이것이 제가 임상에서 본 것을 설명해 준다고 생각해서 씁니다.

그리고 오래된 병이 모두 되돌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되돌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 말씀드리는 것이 제가 지키려는 선입니다.


몸은 정직합니다. 다만 바로 말하지 않을 뿐입니다.

오래 참아 준 몸에게 필요한 것은, 오래 기다려 주는 치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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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미르애한의원 광진점 대표원장 허지영 프로필 사진

허지영 대표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병리학(질병의 기전)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같은 대학 본초학 교실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약물을 연구했습니다. 질병과 약물을 양쪽에서 연구한 이력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 "이 약이 왜 이 병에 듣는가"를 병리와 약리 양쪽 언어로 설명합니다. 자율신경과 만성·난치질환, 체형·구조의 문제를 현대과학의 언어로 설명하고, 원인에 맞는 치료를 제안합니다. 한의사를 대상으로 처방과 임상 강의를 10년 이상 해 왔으며, 저서 《한의사들이 읽어주는 한의학》 공동 저자입니다. 이 책은 2018년 하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기술과학 분야 15종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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