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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설 때 눈앞이 캄캄하다면 — 빈혈보다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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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감수 허지영 대표원장

"앉았다 일어나면 눈앞이 하얘져요. 빈혈인가 해서 검사했는데 정상이래요."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대개 철분제를 드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별로 안 나아지십니다.

그럴 만합니다. 피가 모자란 게 아니거든요.

일어서면 피가 아래로 쏠립니다

누워 있거나 앉아 있을 때 피는 온몸에 고르게 있습니다. 그런데 벌떡 일어서는 순간, 중력이 피를 다리 쪽으로 끌어내립니다.

한두 방울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상당한 양이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만큼 심장으로 돌아오는 피가 줄고, 심장이 내보내는 양도 줍니다. 그리고 머리는 심장보다 위에 있지요.

그러니 아무 장치가 없다면, 사람은 일어설 때마다 쓰러져야 합니다.

몇 초 안에 되돌리는 장치가 있습니다

목의 동맥에는 압력을 재는 자리가 있습니다. 피가 지나가며 벽을 미는 힘을 계속 재고 있습니다.

일어서서 그 압력이 뚝 떨어지면, 이 자리가 즉시 알아챕니다. 그리고 신호가 갑니다 — 혈관은 조여라, 심장은 빨리 뛰어라.

그러면 몇 초 안에 압력이 돌아옵니다. 우리가 하루에 수십 번 일어서면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이 장치가 매번 조용히 일해 주기 때문입니다.

어지러운 분들은 이 장치가 반 박자 늦습니다. 결국은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몇 초 사이에 뇌로 가는 피가 잠깐 모자라고, 그 순간이 눈앞이 하얘지는 그 순간입니다.

빈혈과 무엇이 다른가

빈혈은 피의 질 문제입니다. 산소를 나르는 짐꾼이 모자란 겁니다. 그러니 일어서든 누워 있든 늘 부족합니다. 계단만 올라도 숨이 찹니다.

이쪽은 배달 문제입니다. 피는 충분한데 자세가 바뀌는 그 순간 배달이 늦습니다. 그래서 일어설 때만 그렇고, 몇 초 지나면 멀쩡합니다.

이걸 가르는 게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철분제는 짐꾼을 늘리는 약입니다. 짐꾼이 모자란 게 아닌데 짐꾼을 늘리면, 안 듣습니다.

이런 얼굴로 옵니다

  • 일어서는 그 순간에만 하얘지고, 몇 초면 괜찮다
  • 오래 서 있으면 힘들다. 특히 아침, 더운 날, 목욕탕
  • 검사에서 빈혈은 아니라고 한다

더운 날과 목욕탕이 왜 걸리냐면, 열이 혈관을 늘려 놓기 때문입니다. 그러잖아도 늦는 장치가 더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진료실에서는

피를 늘리려 하지 않습니다. 모자란 게 아니니까요.

늦는 장치가 왜 늦는지를 봅니다. 잠인지, 오래된 긴장인지, 먹는 양이 적어서인지. 자율신경이 전반적으로 지쳐 있으면 이 반응도 같이 굼떠집니다. (손발은 차고 가슴은 두근거린다면)

그리고 당장 오늘 하실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천천히 일어나십시오. 앉아서 잠깐 발목을 몇 번 움직였다가 일어서면 다릅니다. 종아리 근육이 펌프 노릇을 해서 피를 위로 올려 줍니다. 물을 충분히 드시는 것도 같은 편입니다.

다만 의식을 잃고 쓰러지신 적이 있거나, 가슴 통증이 함께 온다면 순서가 다릅니다. 그때는 심장부터 보셔야 합니다.


일어설 때마다 하얘지는 것은 피가 모자라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모자란 것은 피가 아니라 반응 속도이고, 그건 다시 빨라집니다.


글: 허지영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학 병리학 박사 · 前 경희대 본초학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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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영 대표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병리학(질병의 기전)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같은 대학 본초학 교실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약물을 연구했습니다. 질병과 약물을 양쪽에서 연구한 이력이 진료의 바탕입니다 — "이 약이 왜 이 병에 듣는가"를 병리와 약리 양쪽 언어로 설명합니다. 자율신경과 만성·난치질환, 체형·구조의 문제를 현대과학의 언어로 설명하고, 원인에 맞는 치료를 제안합니다. 한의사를 대상으로 처방과 임상 강의를 10년 이상 해 왔으며, 저서 《한의사들이 읽어주는 한의학》 공동 저자입니다. 이 책은 2018년 하반기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었습니다(기술과학 분야 15종에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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